[수필] 등잔과 관솔불이 있는 풍경 - 이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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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바람은 온갖 것들을 흔든다. 흔든다기보다 숫제 들쑤신다는 표현이 맞겠다. 초가지붕 깊숙이 추운 겨울을 나던 참새도 봄볕을 찾아 나선지 벌써 달포가 지났다. 보리밭 검은 땅이 푸른 물결로 바뀌려면 가까이 지나는 계곡 물안개가 서너 번 더 피어올라야 할게다. 갯버들이 물을 빨아올리며 연초록 색깔 봄을 만들기 시작하자 돌돌거리는 물소리에 얼굴을 씻어대던 키 작은 버들개지는 붉고 노란 꽃잎을 자주 빛 봉우리에 달고 아직 깨지도 않은 벌과 나비들을 부른다. 산골 오후 거친 돌개바람은 멧비둘기가 깃털을 터는 대밭을 지나 부드럽게 초가집 안마당에서 밤을 준비한다.
산꼭대기에서부터 손톱만한 낮달을 따라 개울을 건너고 울바자 문을 통해 낡은 초가지붕 위를 지나, 낮고 좁은 어두운 방으로 따라 들어온 어스름은 오래토록 쉬어 갈듯이 미처 온기도 자리를 펴지 않은 멍석자리 윗목에 웅크린다. 봄기운에 붙들려 산과 개울을 정신없이 휘젓고 다니던 아이는 쇠죽솥 아궁이에서 관솔불을 붙여 아래채 큰사랑방과 작은사랑방 벽을 튼 구멍사이 얹혀있는 등잔에 불붙인다. 지나간 겨울 간벌한 소나무 장작을 패던 형 곁에서 눈총을 맞아가며 참솔 옹이들 중 고르고 골라 만든 소중한 관솔이다. 지지직 소리를 내며 불이 붙은 관솔은 연한 송진 내음을 풍기며 어둠을 밀어낸다. 호박(琥珀)같이 투명한 관솔을 이쑤시개 정도로 가늘고 잘게 만드는데 연필 깎는 칼 몇 개를 망가뜨렸다.
메주 삶는 날엔 부지런히 훔쳐 먹은 메주로 배탈을 만나 대문가 통시에 왔다 갔다 하느라고 아껴두었던 관솔도 이제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사기등잔에 불이 붙자 흐릿한 어둠이 밀려나며 앉은뱅이책상 위 책들이 모습을 보인다. 벽을 튼 작은 공간에 자리한 사기 등잔불은 방문을 열 때마다 위태롭게 일렁이다 꺼질 듯 살아난다. 몇 개의 관솔이 오늘 저녁에 또 없어질 것이다. 초봄 짧은 밤 어둠은 어른들 발자국을 따라 지친 듯이 찾아 왔다가 관솔과 등잔불 때문에 솔 연기 냄새 짙은 사랑방에서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쫓겨난다. 가슴이 뛰고 있는 이른 봄 아이들은 밤이 없다. 어둠이 깊어 갈수록 사기등잔 심지(燈心)는 줄어들고 콧구멍은 새카맣게 그을음이 앉는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는 낯선 글자들이 새겨진다. 가난한 시절 아이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등불 하나씩을 켜고 살았다. 배고픔과 어둠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가슴 속에 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절 가슴에 품었던 마음속 등불과 관솔들이 씨 불이 되어 지금의 풍요와 봄 같이 환한 세상을 만들어 내었지 싶다.
이덕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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