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딸루나 한인회 - 바르셀로나 한인회

 
   
 



 스페인/바르셀로나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는 내용들은 이동 또는 임의 삭제 될 수 있습니다.

건전한 한인회 홈페이지 운영을 위해 협조를 부탁 드립니다.

총 게시물 192건, 최근 0 건
   

[수필] 등잔과 관솔불이 있는 풍경 - 이덕대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18-03-24 (토) 05:00 조회 : 98

봄이 오면 바람은 온갖 것들을 흔든다. 흔든다기보다 숫제 들쑤신다는 표현이 맞겠다. 초가지붕 깊숙이 추운 겨울을 나던 참새도 봄볕을 찾아 나선지 벌써 달포가 지났다. 보리밭 검은 땅이 푸른 물결로 바뀌려면 가까이 지나는 계곡 물안개가 서너 번 더 피어올라야 할게다. 갯버들이 물을 빨아올리며 연초록 색깔 봄을 만들기 시작하자 돌돌거리는 물소리에 얼굴을 씻어대던 키 작은 버들개지는 붉고 노란 꽃잎을 자주 빛 봉우리에 달고 아직 깨지도 않은 벌과 나비들을 부른다. 산골 오후 거친 돌개바람은 멧비둘기가 깃털을 터는 대밭을 지나 부드럽게 초가집 안마당에서 밤을 준비한다.

산꼭대기에서부터 손톱만한 낮달을 따라 개울을 건너고 울바자 문을 통해 낡은 초가지붕 위를 지나, 낮고 좁은 어두운 방으로 따라 들어온 어스름은 오래토록 쉬어 갈듯이 미처 온기도 자리를 펴지 않은 멍석자리 윗목에 웅크린다. 봄기운에 붙들려 산과 개울을 정신없이 휘젓고 다니던 아이는 쇠죽솥 아궁이에서 관솔불을 붙여 아래채 큰사랑방과 작은사랑방 벽을 튼 구멍사이 얹혀있는 등잔에 불붙인다. 지나간 겨울 간벌한 소나무 장작을 패던 형 곁에서 눈총을 맞아가며 참솔 옹이들 중 고르고 골라 만든 소중한 관솔이다. 지지직 소리를 내며 불이 붙은 관솔은 연한 송진 내음을 풍기며 어둠을 밀어낸다. 호박(琥珀)같이 투명한 관솔을 이쑤시개 정도로 가늘고 잘게 만드는데 연필 깎는 칼 몇 개를 망가뜨렸다.

메주 삶는 날엔 부지런히 훔쳐 먹은 메주로 배탈을 만나 대문가 통시에 왔다 갔다 하느라고 아껴두었던 관솔도 이제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사기등잔에 불이 붙자 흐릿한 어둠이 밀려나며 앉은뱅이책상 위 책들이 모습을 보인다. 벽을 튼 작은 공간에 자리한 사기 등잔불은 방문을 열 때마다 위태롭게 일렁이다 꺼질 듯 살아난다. 몇 개의 관솔이 오늘 저녁에 또 없어질 것이다. 초봄 짧은 밤 어둠은 어른들 발자국을 따라 지친 듯이 찾아 왔다가 관솔과 등잔불 때문에 솔 연기 냄새 짙은 사랑방에서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쫓겨난다. 가슴이 뛰고 있는 이른 봄 아이들은 밤이 없다. 어둠이 깊어 갈수록 사기등잔 심지(燈心)는 줄어들고 콧구멍은 새카맣게 그을음이 앉는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는 낯선 글자들이 새겨진다. 가난한 시절 아이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등불 하나씩을 켜고 살았다. 배고픔과 어둠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가슴 속에 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절 가슴에 품었던 마음속 등불과 관솔들이 씨 불이 되어 지금의 풍요와 봄 같이 환한 세상을 만들어 내었지 싶다.

이덕대(수필가)


이름 패스워드
☞특수문자
hi
왼쪽의 글자를 입력하세요.
   

총 게시물 192건, 최근 0 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92
가월(嘉月)의 아침 해가 산마루를 끌어 내리며 안개 속에 잠긴 마을로 다가서면 몇 아름드리 되는 느티나무와 팽나무, 이팝나무 숲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팔을 벌리고 즐겨 봄 햇살을 맞는다. 밝은 아침 해는 나무와 하늘의 경계에서 부서지고 부서진 빛의 파…
관리자 04-03 75
191
안녕하세요 까딸루냐한인회 여러분.  동아제약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대학생 국토대장정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본 행사는 동아제약에서 사회환원 차원에서 주최하는 공신력 있는 행사로 매년 많은 대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199…
관리자 03-28 100
190
봄이 오면 바람은 온갖 것들을 흔든다. 흔든다기보다 숫제 들쑤신다는 표현이 맞겠다. 초가지붕 깊숙이 추운 겨울을 나던 참새도 봄볕을 찾아 나선지 벌써 달포가 지났다. 보리밭 검은 땅이 푸른 물결로 바뀌려면 가까이 지나는 계곡 물안개가 서너 번 더 피어올라…
관리자 03-24 99
189
1분 소개 영상: <iframe src="https://player.vimeo.com/video/235769690" width="640" height="360" frameborder="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iframe>15분 소개 영상: <iframe src="https://player.vimeo.com/video/235767251" width="640" height="360" frameborder="0" webkitallowfullscreen moza…
관리자 03-16 178
188
벌레가 입을 떼고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났으니 이제 봄이 본격적으로 올 것이다. 남녘의 바다에서부터 동토의 북녘까지 어김없이 봄은 사뿐사뿐 오고 있을 것이다. 봄은 봄비로부터 오는 것 같지만 빛, 바람, 소리로도 온다. 어린 시절 봄은 여러 가지로부터 왔다. …
관리자 03-08 118
187
안녕하십니까, 교민 여러분! 조성희 관장님 (전한글학교교장) 아들인, 배우 Alberto Jo Lee 씨가 출연한 영화 'Paella Today'가 오는 25일 개봉합니다.  교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까딸루냐 한인회-
관리자 03-07 306
186
흥무산 위로 정월 대보름달이 떠오른다. 냇가 논 가운데 커다란 달집이 지어지고 가오리연, 방패연이 가운데 솟아있는 높다란 대나무에 매달려, 농염하게 타오르는 짚불과 연기를 따라 우쭐우쭐 춤을 춘다. 상쇠 어른은 지신밟기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연신 ‘꽹…
석산 03-02 62
185
어린 시절 설은 풍요로움이었다. 시간의 열차가 지나고 나면 다시 올 수 없는 과거 행복의 시간들이 아쉬울 때가 이즈음이다. 어차피 삶이란 가만히 엎드려 있건 달리고 있건 시간이란 것이 곁을 스치고 지나가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만져지지도 않는 시간…
석산 02-22 162
184
11. 무한한 잠재의식의 힘을 활용하라. Use the Unlimited Power of Your Subconscious Mind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1977년 플로리다 주에 평범한 63세의 로라 슐츠라는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손자의 팔이 승용차에 깔리게 되는 사고를…
관리자 02-14 130
183
이덕대 멀리서 들려오는 찰그랑찰그랑 엿장수 가위질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순식간에 입에는 한가득 침이 고이고 눈은 허공을 쳐다보다가 엿과 바꾸어 먹을 수 있는 낡은 흰 고무신이나 찌그러진 주전자 뚜껑, 냄비라도 찾는지 몹시 분주하게 움직인다. 엿장수…
관리자 02-08 104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